#1. 어느날 미국의 한 회사원은 신경질적이고 우울한 상태가 되어 퇴근했다. 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해 자살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칫하면 가족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겠다 싶어, 안전하게 자살하는 방법으로 죽을 때까지 뛰기로 결심했다. 비만에 골초였으니 곧 심장마비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최대한의 속도로 뛰었다. 남들이 보기엔 느리고 숨 헐떡이는 우스운 모습이지만, 그에게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심장마비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제대로 준비하고 더 빠른 속도로 더 멀리 뛰었다. 그래도 심장마비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엔 더 빨리 더 멀리 두번이나 달렸는데 점점 몸도 마음도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마비는 커녕. 기운이 샘솟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달리기를 한다고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치유해주는구나.' 그래서 달리기 장비를 잔뜩 구입하고, 더 멀리 뛰었다. 그런데, 길을 건너다 그만 화물 트럭에 치여 죽었다. 

이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다.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이야기라고 한다. 토르 고타스의 <러닝- 한편의 세계사>가 소개하고 있는 것을 가져다 약간 각색해봤다. 조깅 열풍이 불 때, 사람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스토리다. 

요즘도 아주 흔하게 듣는 말이 "살 빼고 뛸게요" "무릎 다치지 않나요?" "야, 나는 뛰다가 심장마비 걸릴거야" 이런 말들이다. 비만과 흡연에 쩔어있는 사람들도 뛰다보면 몸이 좋아진다. 과학이라기보다는 감정에 가깝지만, 실제 체험담을 담고 있는 감정이다. "과학적으로 내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내가 해보니 되더라." 이런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고, 많은 사례가 있다. 

미국 대륙을 홀로 뛰어 횡단한 강명구 러너는 이렇게 말했다.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1주일쯤 뛰었더니 몸이 야성적으로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뛰다보면 몸이 원시적으로 강인함을 찾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위 이야기의 끝이 비극인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장비를 갖추고 문명적 준비를 철저히 하고 났더니 더 큰 문명에 부딪혀 끝나버리는 상황이 뭔가 상징적이다. 이렇게까지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린시절, 청년시절, 군인시절, 성년시절 등 삶의 여정이 곧 달리기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스터./ imdb.com
어린시절, 청년시절, 군인시절, 성년시절 등 삶의 여정이 곧 달리기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포스터./ imdb.com

  #2. 1960년대 조깅이 조금씩 퍼져 나가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콘월공원에서도 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사람들이 조깅을 하면 운전자들이나 다른 도로 이용자들과 충돌이 생겼던 것. 한 러너가 어두운 길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그때 경찰차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지금 뭘하고 있는지 물었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경찰에 답했더니, 경찰은 "아하, 그러신가? 우리가 모를 줄 알아?"라고 하면서 그를 체포해 밤새 구금했다. 건강을 위해 밤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마도 밤도둑쯤으로 여겼으리라.

1960~1970년대 사람들은 자유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 전쟁에 반대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외쳤다. 그러면서 개인들의 퇴폐를 자유로 인식하는 쪽과, 개인의 건강을 자유로 인식하는 쪽이 생겨났다. 물론 뒤섞여 있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뛰는 것과 거리를 달리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밖에서 뛰기 시작하면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따라 뛰는 사람들, 비웃는 사람들, 그리고 단속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부분은 아직도 그렇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는. 

유행이나 혁명은 거창한 개념이지만, 그 출발은 거창하지 않다. 아주 드물게 계획 세우고 기획해서 혁명을 일으키긴 하지만, 그래도 그 바탕이 충분했기 때문에 성사되는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생긴 평지돌출이 아니다. 조깅혁명, 달리기 바람도 마찬가지.

그냥 좀 튀는 한 사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꼭하는 한두 사람이 거리에서 뛰면 그것이 공감을 얻는 경우, 유행이 되고 바람이 되고 혁명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선각자가 필요한 동시에, 그 필요성을 공감하는 대중도 필요하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살 빼고, 면역력을 강화하고 건강한 몸으로 복귀하고 싶어하고 있다. 지금, 혁명의 씨앗이 무르익고 있다.  

포레스트 검프가 달리기를 계속하자 그는 점점 유명해졌고, 대중들은 처음에 쭈뼛쭈뼛 호기심을 표하다가 나중에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imdb.com
포레스트 검프가 달리기를 계속하자 그는 점점 유명해졌고, 대중들은 처음에 쭈뼛쭈뼛 호기심을 표하다가 나중에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imdb.com

#3. 아이큐 75, 조금 모자란 아이 포레스트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냥 뛰는 것. 잘 뛰었다. 아이들이 괴롭혀도 뛰었고, 일이 있어도 뛰었다. 잘 뛰었더니 앨라배마 대학교 미식축구 선수로 입학할 수 있었다. 뛰다보니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잘 뛰다보니 위기에 빠진 동료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엉덩이를 부상당했더니 탁구를 잘한다는 것을 알게됐고, 그의 탁구는 미국과 중국의 이른바 '핑퐁외교'의 도화선이 된다. 그가 달리면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달린다. 처음엔 혼자 뛰었다. 하도 열심히 계속 뛰니까 신기해서 한두명 따라 뛰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따라 뛰었다. 그러다 보니 포레스트는 한 무리의 지도자처럼 앞서 뛰고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 뛰게 되었다. 마치 철새가 이동할 때 리더가 앞서고 뒤에 무수한 새떼가 따르는 것처럼.

톰 행크스라는 걸출한 배우가 아주 멍청한 듯하지만 아주 순수한 포레스트 검프를 연기했다. 사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잘 몰랐다. 왜 뛰는지. 왜 뛰는지 설명이 잘 안된 것이 이 영화의 흠인 듯하다고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냥 뛰는 것, 그 자체가 목표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뭔가를 한다. 혹은 아무 생각없이 저질러 놓고는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느라 바쁘다. 그런데 달리기는 그렇지 않다. 우리 몸은 수만년 동안 달리기에 적합하도록 진화해 왔고, 그 몸이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저 뛰어야 하는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는 그저 뛰었다. 그의 지능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을 기획할만하지 않은 캐릭터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뛰었을 뿐인데, 잘 뛰는 것을 알게 됐고, 점점 더 잘 뛰어졌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었지만, 자신의 몸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달리기 본능'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게 되고, 따라뛰게 되고, 리더가 없어도 스스로 뛰게 된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에밀 자토펙의 이 말은 언제 들어도 큰 울림이 온다. 1960~1970년대에 있었던 조깅혁명은, 인간 몸 속에 쌓여있는 근질거림이 있었기에 폭발할 수 있었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깅은 유쾌하다. 처음엔 몇몇 용감한 사람들의 도발처럼 시작했으나, 지금은 산업의 한 영역이 되었다. 지금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가 즐겁게 달려보자./ Unsplash
조깅은 유쾌하다. 처음엔 몇몇 용감한 사람들의 도발처럼 시작했으나, 지금은 산업의 한 영역이 되었다. 지금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가 즐겁게 달려보자./ Unsplash

초기의 조거들은 유쾌한 형태의 달리기를 '조깅 jogging'이라고 불렀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하게 뛰는 것을 조깅이라고 했다. 이 말은 17세기 영국에서 사람이나 동물이 부드럽게 뛰는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었고, 가끔은 빠르게 뛰는 말을 묘사할 때도 사용됐다. 19세기 오스트레일리아 소설가가 '아침 조깅'이라는 표현을 써 좀 더 알려졌다지만, 이 무렵까지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말이 아니었다. 요즘은 산업의 아이템이 될 만큼 시장이 커졌지만, 처음엔 뭐, 이런 것을 하나,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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