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죽는다.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

'Cotidie Morimur= We die every day.'  로마의 철학자이며 저술가이며 정치가인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스토아 철학의 일원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그 철학에 맞춰 살아온 세네카가 적은 이 유명한 말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며, 매일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meditatio mortis)'이 바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세네카가 하도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조금 더 소개하자면, 그는 이집트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AD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칼리굴라 황제와 충돌했는데, 그는 목숨이 얼마 남지않았다는 변론으로 사형을 면하고,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는 황제의 조카딸과 간통을 했다는 혐의로 코르시카로 추방된다. 거기서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하다가 황제의 부인 덕분에 로마로 다시 돌아왔고, 50년에 집정관이 된 뒤 브루투스와 친구가 되는가 하면, 네로 황제의 스승이 된다.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재정 법률 개혁을 단행했으며 노예에 대한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하는 등, 미래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해낸다. 권력에서 밀려나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감하지만, '본보기 될 삶을 남겼다'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품위를 유지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저술가 작가 청치인이었던 세네카가 그의 제자 네로 황제와 함께 있는 조각상( Eduardo Barrón)./ wikipedia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며 저술가 작가 청치인이었던 세네카가 그의 제자 네로 황제와 함께 있는 조각상( Eduardo Barrón)./ wikipedia

젊은 노예와 함께 달린 세네카

워낙 극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각종 저작이나 영화에도 종종 등장하는 세네카는 달리기를 좋아했다.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신체를 세심하게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세네카에게는 딱 적합한 철학이었다. 여성편력과 반역논란 등 파란만장한 가운데서도 달리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고통 받았다는 세네카는 여러가지 치료법을 사용해 봤다고 한다. 그리고 정착한 건강법이 달리기. 세네카는 자주 젊은 노예와 함께 달리기를 했다. 파리우스라는 이름의 노예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샌들의 끈을 묶고 대형 공동목욕탕으로 가면 달리기 준비가 끝난다. 로마의 거리는 달리기 훈련에 부적합했고, 그들은 주로와 운동장이 갖춰져 있는 공동목욕탕에서 달리기를 했다. 거기서 만나는 철학자들과 담론도 나누고 운동도 했다. 

자존심 강한 세네카는 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을 잘 아는 젊은 노예 파리우스는 늘 그보다 뒤에 처져서 달렸고, 늦게 골인했다. 노예신분에 어울리는 적절한 행동이기도 했지만, 주인의 분노가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렇게 달리던 어느날 둘이 같이 골인했다. 사건이다. 세네카는 이 사건을 유머와 역설을 섞어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는 몸이 덜 튼튼한 노예를 구해야겠군. 이름난 위대한 사람이 되어가지고 하잘것 없는 노예가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은가."

 

새로운 로마 건설을 꿈꾸며 옛로마를 불살라 버리려하는 네로 황제와 그의 신하들. 1951년 작 영화 '쿼바디스'의 한 장면./ imdb.com
새로운 로마 건설을 꿈꾸며 옛로마를 불살라 버리려하는 네로 황제와 그의 신하들. 1951년 작 영화 '쿼바디스'의 한 장면./ imdb.com

"자신의 결단이 수정처럼 투명해질 때까지 달려라"

세네카는 운동은 가치 있지만 꼭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주가 되면 너무 많은 긴장감을 소모하게 되기 때문. 그와 스토아 철학자들은 검투사의 대결을 혐오했고, 원형경기장에서 터져나오는 박수갈채와 환호로부터 멀리 있으며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저 달리기처럼 평화로운 심신단련을 좋아했을 뿐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린 사람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쉬고 자신의 결단이 수정처럼 투명해지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언덕의 정상을 향해 달려야 한다."

세네카 뿐 아니라, 당시의 철학자나 정치인들은 달리기를 통해 건강을 유지했다. 학식 있는 로마인들은 달리기와 걷기가 비만을 줄이고 사람을 원기 왕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이성(理性)의 힘을 믿는 그들은, 유연성과 지구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더라도 달리기를 계속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깨달음을 실천했다.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고대의학의 양대천재로 불리는 갈레노스의 전신상(Bernard Gagnon 제작)이 그의 고향 터키 페르가몬에 있다. / Wikipedia
히포크라테스와 함께 고대의학의 양대천재로 불리는 갈레노스의 전신상(Bernard Gagnon 제작)이 그의 고향 터키 페르가몬에 있다. / Wikipedia

로마인의 비만 해결위해 달리기 권장한 갈레노스

시계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로마인들은 장거리달리기의 정확한 측정도 시도했다. 경주로의 순회 횟수나 길이를 계산했고, '어떤 사람은 25만 관중이 모인 원형경기장에서 160마일(256km)을 달리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기록도 남겼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만큼이나 유명한 고대시대의 대표적 의사인 갈레노스는 검투사들과 함께 일했는데, 검투사들의 비만을 해결하기 위해 달리기를 권장했다. 대식가로 유명한 로마인들에게 절제와 체중감량은 매우 중요했다. 갈레노스는 달리기와 함께 다른 운동도 권유했는데, 달리기만으로는 남자다움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이미 '유산소+무산소'의 운동원리를 파악하고 권장했던 셈이다. 

신약성경의 가장 유명한 저자인 사도 바울은 고린도(코린트)에 사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적었다.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달리지만 오로지 한 사람만이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가? 여러분이 이길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달려라."

고대로마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달리기는 인생의 축소판처럼 인식된 것이다. 그 승자가 되기 위해서든, 그저 좋아서든 그들은 달리기를 좋아했고, 달리기를 존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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