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울고 있다.
손기정. 그를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 때문이다. 1936년 히틀러가 내려다보고 있는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으며 마라톤 우승자로 골인한 그 장면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상식에서의 슬픈 표정, 월계수 화분으로 가슴을 가린채 슬프게 고개 숙인 그의 사진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고국에서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우고는 일경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한 언론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우승한 뒤 커다란 태극기를 흔들며 이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부둥켜안고 감동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울고 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우승
베를린올림픽이 열린 1936년에도 독일은 전쟁 중이었다. 히틀러의 독일군은 스페인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독일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 싶은 히틀러는 어마어마한 올림픽 스타디움을 건설하고, 그곳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인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아시아에서 온 자그마한 영웅이 탄생했다. 손기정. 163cm의 작은 동양인. 비록 자신들과 가까운 일본선수이긴 했으나, 아리안을 숭상하는 히틀러로서는 달갑지 않았을 터. 하지만 어쩌랴, 만인주시 하에 이 사람이 마라톤 우승자인 것을.
신의주의 가난한 집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손기정은 달리기에 심취해 달리기로 유명한 학교, 양정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그 뒤로 열린 희망의 시간들.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들과 경쟁하며 최고의 반열에 오른 그가 마침내 올림픽 선수로 출전하게 된다.
세계가 주목하는 아르헨티나의 사발라가 선두에서 치고 나가고, 영국의 신사 하퍼가 그와 나란히 달렸다. 손기정은 자신을 믿고, 자신의 속도로 꾸준히 선두를 뒤쫓았고 초반에 오버페이스의 우를 범한 사발라는 30km 지점에서 쓰러지고 만다. 이제 선두에 선 손기정. 비스마르크 언덕을 사력을 다해 뛰어오르고 마침내 스타디움에 들어선다.
"야판, 키타이 손!"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과 10만 군중의 환성. 그때까지만 해도 우승의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가장 슬픈 금메달, 가장 슬픈 사진
시상식이 열렸다. 승리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국기게양대에 걸리는 일장기가 보였다. 가슴에 달려있는 일장기가 느껴졌다. 분노와 슬픔, 그의 표정에서 기쁨은 지워지고 슬픔이 대신했다.
시상자에게서 받은 월계수 화분을 가슴에 가져다댔다. 일장기가 가려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리에 월계관이 씌워지는 순간에,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퍼졌다. 왠지 처량한 느낌의 천황찬가. 올림픽 스타디움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 국가를 들으니 더욱 슬퍼졌다. 빨리 국가연주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월계수를 들고, 월계관을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찡그리고 있는 손기정. 이 장면을 담은 한장의 사진은 역사가 되었다. 손기정에게 역사가 되었고, 이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한국언론사의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가장 슬픈 사진을 이야기한 '어느 독일인의 글'로 인해 현대사에 편입되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본 한 장의 사진 때문에 이 나라, 아니 이 민족에 얽힌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36년 히틀러 정권시절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최됩니다. 그 당시에 마라톤경기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1등과 3등을, 그리고 2등은 영국인이 차지합니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그 표정이라는 것이… 그건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입니다… 정말 불가사의한(아리송한) 사진입니다… 왜 그 두 사람은 그런 슬픈 표정을 지으며 시상대에 올라 있는 것일까요?
▶일장기 말소사건, 심훈의 헌시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이 멀고먼 길을 돌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동안, 국내에서는 '일장기 말소사건'이라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손기정의 우승소식은 온 국민이 기뻐날 뛰는 소식이었다. 온 나라가 손기정 이야기에 온통 달리기 열풍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조선중앙일보의 유해붕 기자는 어차피 흐릿한 사진, 손기정 가슴의 사진을 지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실천한다. 잘 안보이는 데 배치한 사진이 무사히 넘어가자, 유 기자는 이를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에게 말한다. 자극받은 이길용. 이상백 화백에게 일장기 삭제를 요청하고, 결국 신문에 실렸다. 제대로....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발견! 이길용 기자를 비롯한 편집국 간부들이 잡혀갔고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이길용 기자의 단독행동이라는 주장에 사건은 끝이 난다. 그러나 결론은 동아일보의 무기한 정간. 이렇게 손기정은 또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그 당시 얼마나 조선인들이 감격하고 흥분해 있었는지는 <상록수>의 작가 심훈의 헌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 <오오, 조선의 남아여!> 중에서
▶1992년 8월 9일 바르셀로나, 황영조가 손기정을~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감격스럽던 1988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 그 최종주자로 등장한 사람은 손기정이었다. 성화를 들고 뛰는 그의 모습은 기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그저 "너무도 기뻤기에 마치 춤추는 것처럼 보인 것뿐이야, 나는 달렸던 거야. 아주 빨리 달렸던 거야"라고 회고했지만.
그리고 4년뒤, 더욱 감동적인 장면이 펼쳐진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8월 9일.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그날이다.
몬주익의 영웅이라고 불리게 될 자그맣고 탄탄한 몸을 가진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우승한다. 2시간 13분 23초. 그는 양팔을 번쩍 들고 손키스를 보내며 환호작약하며 골인한다. 묘하게도 우승자는 한국 황영조, 은메달은 일본 모리시타, 동메달은 독일 슈테판 프라이강이었다.
그 장면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움켜쥐고, 진정으로 기뻐하던 한 사람, 바로 손기정이었다. 울고 있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저쪽으로 보란다.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있는 황영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황은 진정한 영웅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두 영웅은 만났다. 끌어안았다. 함께 기뻐했다.
팔순의 손기정은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그는 이땅의 사람이며, 이땅의 역사다. 그의 고생과 역경, 땀이 있었고, 그의 행복이 있었다. 그는 진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글의 기본이 된 청소년을 위한 인물이야기 <슬픈 금메달>의 작가 김영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독일학생을 위해 쓴 글이 나중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다. 인터넷에는 <어느 독일인의 글>이 여러 버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가능하면 동영상과 함께 잘 정리된 글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슈테판 밀러라는 독일인이 한국인에게 준 귀한 선물이다. 심훈의 헌시, 동아일보의 사진과 기사들, 그 이후 각종 언론에서 보도한 손기정의 인터뷰들은 하나하나가 삶의 교훈이다. 마라톤이 인생의 축소판이듯, 손기정은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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