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병동에서 환자 보호자가 어머니 드리려고 가져온 바나나를 나눠 주셨다. 치아가 좋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는 바나나가 참 좋은 효자 음식이다.
의무기록을 작성하다가 키보드 옆에 놓인 그 바나나를 무심결에 한 입 베어 물었더니, 입안에 부드럽게 녹아드는 단맛과 함께 문득 어릴 적 바나나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1980년대 초반) 바나나는 무척 귀하고 비쌌기 때문에 구경하는 것도 어려웠다. 바나나 실물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일이라는 환상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언젠가 우리 동네 동갑내기 녀석이 바나나를 가져와서는 자랑하듯 내 앞에서 먹었다. 누가 선물로 줬대나 어쨌대나. 이미 몇 입을 베어 먹었는지 길다란 바나나는 안 보이고, 시커멓고 조그만 두 손안에 하얀 바나나 한 덩어리가 고이 감춰져 있었다. 손가락 틈새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그 바나나라는 과일이 빛을 뿜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한 조각 얻어 먹었는지,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애써 태연한 척 구걸을 꾹 참았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욕심 많은 그 녀석이 아까운 바나나를 나눠줬을 리는 없다. 말로만 듣던 바나나를 처음 목격하였지만 실제 맛을 접하지는 못하였으니 바나나에 대한 환상만 더 커져 버린 셈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놀랍게도 엄마가 시장에서 그 귀하고 비싸다는 바나나를 사 오셨다. 무슨 돈이 있어서 바나나를 사오셨나 싶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바나나를 마음껏 맛볼 기대에 온 몸의 털이 반가이 일어서는 것 같았다. 두 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형 하나 나 하나 서로 눈치 싸움 안하도록 나눠 먹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바나나. 껍데기가 벗겨지지 않은 온전한 바나나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녀석들의 껍데기가 노랗지 않고 시커먼 것이었다. 뭔가 좀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바나나는 시장 과일가게에서 거의 폐기 직전까지 간 놈들을 엄마가 싸게 사온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은 바나나인 것을! 껍데기를 벗기었더니 그 속도 거무튀튀하고 물컹했다.
그래도 이것은 바나나인 것을! 잔뜩 기대한 채 혀의 미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 입 물어 보았다.
'아니 이게 뭐야... 바나나가 왜이래?' 속으로 그랬지만 엄마 앞에서 맛있는 척 꾸역꾸역 삼켰다. 엄마는 자신이 먹어볼 엄두도 못내시고 물끄러미 자식들이 바나나 먹는 것만 바라보셨겠지. 흐뭇하게...? 아니면 안쓰럽게...?
나와 바나나의 첫 대면은 그렇게 대실망을 남겼다. 하긴 상하기 직전의 시커먼 바나나가 맛이 있을리가 있겠는가. 여하튼 그 후로 바나나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고, 커서도 나는 별로 바나나를 즐기지 않았다. 씹는 맛도 별로고 텁텁한 것이 좀, 그냥 별로였다. 다른 과일처럼 땡기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는 밥도 잘 넘기지 못하셨다. 그 20개월 전에 대장암이 간에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두 번 받았으나 부작용이 심해 중단하였다. 아들이 명문 의대를 나왔고, 또 아들이 수련받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의학적인 방법으로는 엄마의 병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들로서는 자책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나나라도 드시게 사 드렸다. 바나나는 입에 넣으면 그냥 녹이듯 삼킬 수 있으니, 엄마는 그거라도 꾸역꾸역 드셨다. 그 바나나는 거무튀튀하지도 않고 싱싱하고 탱탱한 녀석이었으나, 내가 어릴 때 처음 먹었던 그 바나나보다 맛이 없어 보였다. 하긴 죽음을 코앞에 둔 몸에 그 어떤 산해진미가 입맛에 닿겠는가.
그 모습이 참 안타깝고 서럽기까지 했다. 내가 어릴 때 엄마가 사 준 그 첫 바나나, 그리고 내가 커서 엄마에게 사 드렸던 그 마지막 바나나 모두 맛이 없더라.
몸이 싱싱할 때는 바나나가 상했고, 바나나가 싱싱할 때는 몸이 상했으니, 바나나는 내게 환상이었고 실망이었으며 설움이었다.
그런데 오늘 환자 보호자가 나눠주신 바나나를 무심결에 먹었는데 참 달다. 바나나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과일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엄마도 저 세상에서 바나나의 제 맛을 느끼고 있으신가 보다.
▶하태국 포근한맘요양병원 병원장은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가정의학 전문의, 통합의학 박사다. 차의과학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 겸임교수이며 유튜브 채널 ‘뜻밖의 의학’을 갖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