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가 이렇게 감동적이어도 되나?
또 울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봉주 선수가 400m 트랙을 세바퀴 돌고 간신히 골인지점으로 들어올 때, 그 주변에서 이봉주를 환호하면서 박수를 치는 모습을 볼 때, 울컥 가슴 어디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고, 눈물이 주루룩 흐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봉주 선수를 응원하러 왔는데, 도리어 위로를 받고 가네요."
전국 각지에서 이봉주 선수의 쾌유를 기원하는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참가신청을 하고, 이봉주 선수가 전성기 때 달리던 속도로 힘차게 뛸 수 있는만큼 나눠 달린 응원객 달림이들의 소감이다. 그만큼 그 장면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날, 그 달리기는 누가 뭐래도 우리 모두의 영혼이 치유되는 '힐링의 순간'이었다.
이봉주 다시 뛰다
2021년 11월 28일은 좀 거창하게 말해서, 한국 마라톤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날이 되었다. 크게는 2년 8개월만에 서울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이 오프라인으로 열리며 코로나19에서 벗어나 이제 자유롭게 뛸 수 있는 날을 만들어 가자는 의지를 확인한 날이다. 물론 제한된 규모로, 지극히 제한적인 장소에서 치러졌지만....
작게는, 바로 '이봉주 쾌유기원 마라톤'이 열린 날이다. 지난해 1월 원인 모를 병으로 허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게 된 이봉주 선수. 그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치료를 받으며 조금 좋아졌다 나빠졌다, 이런저런 치료를 받았고, 수술도 받았다. 회복과 악화의 오르내리막을 경험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왔다. 다시 뛸 수만 있다면... 다시 마라톤을 뛸 수 있기만 하다면...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던 이봉주 선수가 이제 조금 뛸 수 있게 되었고, 뜻 좋은 사람들이 '이봉주 쾌유기원 마라톤'을 만들었다.
28일 일요일 오전 9시 부천종합운동장에는 함께 뛸 195명의 달림이들과 이봉주 선수, 그리고 많은 취재진이 모였다. 국민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를 좋아하는 달림이들이 10개의 조로 나뉘어 4km씩 5바퀴를 뛰어 40km를 채웠고, 나머지 2.195km를 이봉주 선수가 페이스메이커들과 함께 뛰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는 계획이었다. 멋지지 아니한가. 이런 운동 종목이 또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계획이 또 있을까.
부축을 받으며 트랙에 등장한 이봉주 선수는 처음엔 혼자 힘으로 뛰었지만, 숨이 차오면서 마스크를 벗어던졌고,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다시 부축을 받으며 뛰었다. 그렇게 400m 트랙을 세 바퀴 돌았다. 1.2km 10분 1초 15. 길고 긴 시간을 뛰었다.
이봉주가 아프고, 페이스메이커들이 아프고, 구경하며 환호한 관중들이 가슴 아팠던 10분 1초. 그러나, 결국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흘린 10분 1초였다. "이봉주, 파이팅" 울려퍼진 외침은, 경기장을 메우고, 우주를 채웠으리라. 간절한 소망은 그리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함께 뛴 사람들
기자는 그날 열린 동아마라톤에 출전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달리기 훈련을 하고, 중계를 본 시간에 어떤 이들은 이봉주 선수와 함께 하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썼다. "희소병을 앓고 있거나, 앓았던 이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대회 전날 밤에 전남 무안에서 올라왔다는 카페 사장 오영복(40)씨는 6년 전부터 척추소뇌변성증을 투병 중이다. 소뇌가 쪼그라들면서 걷고, 달리고, 균형을 잡는 모든 일이 힘들어지는 병이다. 아직 뚜렷한 치료법이 없다. 아내 장미(41)씨와 최근 카페를 개업한 오씨는 커피를 만들 때도 잔뜩 땀을 흘리고 컵에 담는 것조차 쉽지 않다고 한다."
한 평생 이봉주 선수의 팬이었던 사람도 있고, 한국육상 단거리의 영웅 임춘애 선수의 두 쌍둥이 아들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돌보아주던 아저씨가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두 청년의 어깨에 기대 달린 날이다. "세계적 선수와 함께 뛰어 영광"이라고 하자 "너희 어머니가 더 훌륭한 선수였다"고 덕담도 나눴다고 한다.
이봉주 선수의 지인인 전직 수영선수는 "너무 많이 울었다. 마음이 아픈데, 봉주가 너무 자랑스럽다"고 울먹였다.
페이스북에는 이날 함께 뛴 아마추어 선수들의 후기도 많이 올라왔다. 트랙 다섯바퀴밖에 돌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이봉주 선수의 쾌유를 빌었고, 그의 전성기 속도에 맞춰 달리며 그의 위대함을 체험했노라는 말도 있었다. 달리는 사람들은 안다. 이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경험이었는지. 함께하지 못한 기자의 마음엔 부러움과 시샘이 넘쳐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아픈 이봉주, 다시 일어나라 이봉주!
이봉주 선수는 지난 6월 척수지주막낭종 제거 수술을 받았다. 6시간 30분에 걸친 수술을 받은 당일에는 복근에 약한 경련이 남아 있었지만, 다음날 새벽이 되면서 복근 경련이 멈췄다. 이봉주 선수는 당시 "수술 경과는 대체로 좋은 편이다. 이제 (허리) 경련 현상도 거의 잡혔다"며 "의사 선생님도 긍정적으로 말씀하셨다. 많은 분이 걱정해주셔서 수술을 잘 받았다"고 말했다.
척수지주막낭종은 낭종이 척수를 압박해 척수증을 유발하는 드문 질환. 척추 어느 부위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데, 주로 흉추부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하며 남자에게 더 흔한 이 질병은 주로 30대 이전에 발견된다. 아직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희귀병이다.
이봉주 선수는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셔서 수술을 잘 받았다”며 “앞으로 건강을 잘 회복해서 여러분께 제가 달리는 모습을 또 보여드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5개월이 지난 지금, 약속처럼 달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불완전한 모습이었지만, 달릴 수 있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마라톤'이었다.
“오늘은 정말 이봉주가 다시 태어난 날이 될 것 같다. 작년 초부터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뛴 적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걱정스럽고, 마음이 많이 힘들었는데, 오늘 오신 여러분의 응원과 걱정이 앞으로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것 같다. 추운데 멀리 오셔서 건강을 기원해주신 여러분의 마음을 잊지 않겠다.”
달리기를 마친 이봉주 선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믿고 있고, 그의 부활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고마움도 알고 있다. 이건, 달리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함께 달린 사람들의 동지애다. 그렇다, 달리기는 희망이요, 사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