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골수형백혈병 경험자인 박정호 기자.
만성골수형백혈병 경험자인 박정호 기자.

2008년 여름. 표적항암제로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병세  (만성골수성백혈병)가 항암제 내성으로 인해 급성기(고형암에서 말기에 해당)로 진행이 되면서 또 한 번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년 생존율 40%, 2년 생존율 20%. 고용량 표적치료제가 더 이상 듣지 않자 주치의는 항암치료(세포독성항암제)를 하자고 권했습니다. 1차 항암치료에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2차 항암치료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그 무렵 외국에서 세상에 단 한 명 뿐인 조혈모세포 공여자를 찾았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하지만 아직 삶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갖기에는 너무 조심스러웠습니다. 그 무렵 책상 의자가 고장이 나서 새로 장만을 해야 했는데 좋은 의자를 산다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져서 저렴한 의자를 샀던 기억이 납니다.

귀욤 미소의 소설 '구해줘'.
귀욤 미소의 소설 '구해줘'.

2009년 초겨울 3차 항암치료 전 휴식기를 갖고 있을 때 귀욤 뮈소(프랑스 소설가)를 만났습니다. 인터넷 서점을 기웃대다가 제목만 보고 주문을 한 책이 ‘구해줘’였습니다. 누군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 저편에 있었나봅니다.

이 책에 대한 첫 느낌은 신선함이었습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묘사와 빠른 전개에 더해 작가 특유의 흡인력 있는 문체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 기대 밖이었습니다. 제가 소망하던 ‘구원’ 대신 등장 인물이 죽음에 이르는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괜히 이 책을 읽었다는 씁쓸함을 느끼며 마지막 장을 덮었던 기억이 납니다.

비록 책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글은 저에게 무언가 여지를 남겼나봅니다. 다음 해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고 회복의 시간을 가질 때 그의 책들을 하나씩 찾아 읽게 되었고 지금은 팬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빠른 전개, 반전, 초현실성, 멋진 주인공들의 로맨스 등을 몰입감 있게 엮어내면서 인간에 대한 사랑, 가족애, 선, 운명 등의 가치도 함께 녹여냅니다. 종종 한 소설의 등장인물이 다른 소설에서 제3자로 등장하는 구성도 재미있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런 그의 소설을 서스펜스 로맨스 스릴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 동안 그의 이야기는 저의 삶에 많은 위안과 활기를 주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수시로 응급실을 드나드는 환자였지만 책을 읽으며 저는 이야기 속의 형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작가가 되어 범인을 쫓고 로맨스를 만들고 뉴욕과 파리의 곳곳을 누볐습니다. 그는 제 어려웠던 한 시절의 현실을 잊게 해 준 고마운 작가입니다.

거의 매년 연말 즈음 귀욤 미소의 새로운 작품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는데 신작을 받아들면 마치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네요. 이번에는 그가 또 어떤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박정호 기자는?

2004년 만성골수성백혈병 진단을 받고 급성기까지 진행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조혈모세포이식 등 치료 등을 거쳐 완전관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21년까지 만성골수성백혈병 카페 '제로클럽' 운영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숲해설가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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