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나에게 커다란 해바라기 그림은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완성된 그림은 큰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다른 그림도 색칠해 볼까? 멋진 인테리어가 되어 줄 그림을 찾아봐야겠어!

명화 그리기 컬러링은 이제 대중화된 취미가 되어 명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러스트 그림을 선택할 수 있었다. 어떤 그림으로 할지 고민하고 있던 중에 병원 암교육센터에서 미술 프로그램으로 ‘보태니컬 아트’ 컬러링을 한다고 해서 신청했다. 보태니컬 아트라니, 어떤 그림을 받게 될까? 예쁜 꽃그림이나 멋진 몬스테라 그림이면 좋겠다.

8주간 주 1회 온라인으로 환우들과 소통하며 2개의 컬러링 그림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하나는 커다란 홍학과 열대식물이 가득한 그림으로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색칠하며 이야기 나눈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다양한 식물 그림이 랜덤으로 배송되어 각자 프로그램 중에 컬러링을 완성하면 나중에 모아서 새해 달력으로 제작해 준다고 했다.

앗! 멋진 몬스테라 그림을 기대했던 나에게는 너무나 심심해 보이는 커다란 잎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진 캔버스가 배송되었다. 바나나 잎 그림이었다.

갑자기 의욕이 없어졌다. 나도 예쁜 그림을 색칠하고 싶어! 이 커다란 잎은 너무 재미가 없게 생겼잖아! 실망감이 몰려왔다. 다른 참여자들은 예쁜 그림을 받으셨을까?

아쉽고 궁금한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온라인으로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캔버스에 물감을 칠했다. 어떤 날에는 색칠하기에만 너무 집중하기도 했고 어떤 날에는 색칠보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많은 분들이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색칠하며 경계선에 신경 쓰거나, 프로그램 시간 이외에도 따로 오랜 시간 동안 색칠해서 목과 허리에 통증을 호소하기도 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그저 투병 중 우울한 마음과 두려움 등 모든 잡념을 뒤로하고 잠시나마 집중하는 시간,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것만으로도 소중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공실이의 해바라기’를 완성한 경험으로 능숙하게 색칠하기 시작했다. 너무 작은 구역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물감 번호를 못 보고 빼먹었어도 괜찮고 선을 삐져 나가도 상관없다. 다른 색깔로 잘못 칠해도 괜찮다. 다시 덧칠하면 된다. 꼭 지정된 물감으로 칠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만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색칠하며 첫 번째 공통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못생긴 바나나 잎을 칠할 시간이 됐다. 으~~. 스케치도 못생겼다. 다른 참여자들의 그림을 보니 몬스테라, 유칼립투스, 선인장 등 식물이 다양했다. 부럽다... 흠… 어쩔 수 없지. 그냥 칠할 수밖에… 연한 초록, 짙은 초록, 탁한 초록 다양한 초록색 물감으로 커다란 바나나 잎을 칠해나갔다.

배경을 다 칠할 때까지도 바나나잎 그림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병원 암교육센터에서 “달력 제작을 위해 필요하니 그림과 그림 제목, 그리고 짧은 소감을 적어 보내 달라”고 했다. 이 못생긴 바나나 잎에 어떤 제목을 붙여야 하지? 흠, 그냥 바나나 잎이지 머… 제품 상자에 적혀 있던 제품명 ‘바나나 리프’. 이게 네 이름이야.

달력 제작을 위해 사진 촬영을 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바나나 잎 그림을 다른 그림들과 함께 거실 벽에 나란히 걸어 두었다. 계속 보다 보니 정이 들었는지 아니면 마음에 안 들어 못난이라고 구박했던 것이 미안해진건지 바나나 잎이 이제는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아무런 기대 없이 편하게 색칠했던 시간들이 쌓여 있어 이제는 그림을 볼수록 마음도 편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바나나 잎을 칠하는 동안 물감이 선을 삐져나가거나 다른 색을 칠했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러 번 덧칠을 하고 그림이 울퉁불퉁해져도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욕심부리지 않았고 스트레스도 없었다.

아, 나도 모르게 초록초록한 바나나 잎을 칠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며 마음을 치유하고 있었구나. 제목이 없던 바나나 잎 그림에게 이제 새로운 제목을 지어줘야겠다.

너는 이제 ‘치유의 바나나 잎’이야. 더이상 못생겼다고 구박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도록 할게. 나에게 치유의 시간을 주어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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