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을 치료하는 의사들은 “완치되나요?”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와 같은 암환자, 가족들의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의사들은 조심스럽게 말한다.
실상과 다르게 지나치게 긍정적이지도, 너무 부정적이지도 않게 말한다.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쌓인 의학적 데이터를 참고하되, 치료 경과나 효과에 대해 매우 보수적으로 접근한다.
그런 의사들이, 서울대병원 의료진이 그에게 “여명 6개월”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위암 4기에 복막 전이.’ 첫 집도의는 위암 절제수술을 위해 가슴을 열었다가 칼도 못 대고 수술을 포기했다. 2014년 3월 불꽃처럼 뜨겁게 사업에 전력을 쏟고 있던 박지형 크리스월드 이사회 의장에겐 너무나 “허탈하고 황망한 순간”이었다.
그는 "기록을 찾아봐도 나와 같은 병기의 생존자는 없었다"며 "삶을 정리하라"는 의료진을 조언을 듣고도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꺾이지 않았다.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 싶었고 슬픈 기억을 줄이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박지형 의장은 의사들의 예상을 계속 갈아치우며 11년째 살고 있다.
최근 에세이집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한 사람입니다’(199쪽, 체인지업 刊)를 낸 박지형 의장은 “좀 더 살아서,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감사하다”며 “이 기록이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혹은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작은 희망을 불씨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2016년 서울대병원에서 그를 수술한 양한광 국립암센터 원장은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한 사람입니다’ 추천사에서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매 순간 삶에 열정을 다해온 그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며 “그 삶은 과정은 모두에게 크나큰 힘이 될 것”이라고 썼다.
유튜브 채널 크리스월드를 운영하고 있는 박지형 의장은 “’기적’이라는 단어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기적이 부디 여러분을 비껴가지 않기를 소망하겠다”고 말했다.
암과 싸우는 게 아니라, 내 삶이랑 싸우는 것
- 위암 4기, 복막 전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당황했지만 이성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체득한 문제 해결 방식이 몸에 배어 있었어요. 감정에 빠지기보다, 다음 스텝을 고민했어요. 병리적으로 본 게 아니라, 원래 하던 방식대로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 6개월 밖에 못 산다는 진단을 받았는데도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 이유는?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저와 맞지 않았어요. 사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나아질 병이 아니었으니까요.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고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주겠다고 했는데도 직원들은 끝까지 남겠다고 했어요.”
- 치료 중에도 마음가짐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요?
"울고불고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감정 소모는 체력 소모이니까요. 그래서 상황을 분석하고, 어떻게 가야 할지를 정리했습니다. 곧 죽는다고 하니까, 어떻게 죽는지 알고 싶었어요. 짧은 시간에 죽는 걸 많이 봤어요. 임종도 끝까지 보려고 했죠. 암으로 죽는 게 아니라 기능이 정리되면서 죽는다는 걸 보고 판단을 했던거죠. 감정적으로 가지 않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려고 했습니다."
- 매우 막막하고 희망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을텐데 냉정하게 받아들이셨네요.
“제가 치료 중에 다른 암환자를 몇 백 명은 본 거 같은데요, 대부분 막 이상해져요. 저랑 같은 나이인 친구 병문안을 갔는데, 그가 와이프에게 ‘야, 물 좀 떠다 줘’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물을 떠왔는데, 컵을 확 집어던지는 거예요. ‘왜 그러는데?’ 하고 물었더니 찬 물을 줬다는거예요. 속으로 미친 거 아니냐고 생각했죠. 그 사람이 2기였는데, 암 투병 중이라고 그런 일상화된 모습이 좀 그렇다라구요.
제가 느끼기에는 암이랑 싸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내 삶’이랑 싸우는 문제 같아요. 저는 그런 생각도 한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어느 정도 살 사람이었는데 확 놔버려요. 저는 그 사람이 부러웠는데, 내가 그 정도면 하늘을 날아다닐텐데 말입니다. 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살 확률이 높고, 죽겠다고 포기하는 사람은 그쪽으로 가더군요.”
- 치료는 어떻게 받으셨나요?
"지금도 받고 있는데요, 항암 치료 횟수가 300이 넘습니다. 지금은 3주에 한 번 씩 표적항암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부작용이 없을 수 없죠.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운 증상이 많은데, 약물로도 조절되지 않는 불면증, 가려움증, 신장 기능 저하도 있어요. 치과 치료도 마음대로 받을 수 없고 왼쪽 다리에 힘이 빠지는 증상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 있는 게 중요한 제게는 그런 부작용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
- 항암 치료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항암제 자체보다도 다음 항암치료를 받을 때까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음식도 맛이 없고, 체력은 바닥이었고요. 제가 젤로다와 시스플라틴을 썼는데, 하루에 체중이 1kg씩 빠지기도 했습니다. 독한 항암제를 제 체중에 비해 고용량을 썼습니다. 그런데 저는 항암을 중단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항암 부작용도 결국 관념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내 몸을 어떻게든 관리하는 건 내 몫이니까요. 그 땐 항암치료 다음 날부터 어김없이 출근했어요.”
하루 하루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
- 완전관해(완치) 판정을 받았으면 더 이상 치료를 안 받아도 될텐데 그렇게 힘든 항암 치료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요?
“완전관해라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치료를 안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걸로 얻는 게 항암치료를 받는 것보다 더 높지 않다고 제가 판단을 했죠. 지금은 표적항암제를 먹기 때문에 고용량 항암치료(젤로다+시스플라틴)를 받을 때보다는 힘들지 않으니까요."
- '나는 당신의 1년을 100억에 사고 싶다'는 소제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1년을 살 수 있다면 100억을 벌어야 한다고 해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1년을 더 산다는 건 노력만으로는 얻어지는 게 아니고, 확신을 못하죠. 그런데 100억을 버는 일은 어떻게든 할 수 있는,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느꼈습니다."
- 기적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에는 죽을 때 깔끔하게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던 적이 있었어요. 그에 비하면 지금은 기적이죠. 지금은 너무 힘들어 죽겠다는 정도가 아니고 견딜 만하니까 이게 기적입니다."
여명 6개월 진단을 받고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 이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누가 읽었으면 좋겠습니까?
"처음에는 굳이 제가 암을 겪었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알려야 하나 싶었어요. 죽는다고 해도 주변에 아무런 말도 안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와 비슷한 병기의 환자 중에 생존자가 거의 없기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분들에게 작은 증거가 되길 바랐어요. 책을 쓰고 나니까 다들 ‘네가 아픈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 앞으로의 삶의 목표, 비전은 어떤 겁니까?
"하루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지만, 긴 목표도 없어요. 11년 전에 ‘6개월 여명’ 진단을 받은 이후에는 6개월 단위의 삶에 익숙해서 먼 훗날에 대해 못 봐요. 긴 미래는 잘 상상하지 않아요. 2014년 당시로 돌아가보면 내가 2025년에 살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잖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10년 뒤 2035년에 제가 살아서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상상이 안돼요. 그냥 하루하루 잘 살다가 또 하나의 기적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 암 투병 중인 분들에게 이것 만은 꼭 하라고 권한다면 뭐가 있을까요?
“운동은 기본입니다. 저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운동했어요. 그리고 잘 먹어야지요. 그리고 병원과 의사의 치료를 신뢰해야 합니다. 병원을 못 믿겠으면 믿을 만한 병원으로 가야 하고, 의사를 못 믿겠으면 의사를 바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믿을만한 의사를 정하고 난 뒤에는 의사 말을 따라야죠. 저는 한 번도 병원과 의사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 암 환자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에게 특별히 더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고 싶은 걸 하세요. 못해본 걸 해보세요.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보다 삶을 살아가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