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에 백혈병...죽음의 두려움은 내려 놓고 투병

‘윤슬’이라는 우리 말이 있다. 발음도 뜻도 아름답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작은 물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스물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을 겪은 정승훈 대표(31)가 “암으로 인해 상실한 일상을 회복하는 치유의 공간을 만들고 싶어” 세운 회사 이름에도 ‘윤슬’이 들어 있다.

암환자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윤슬케어'의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작은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 회사 정승훈 대표도 암경험자다./사진제공-=아미북스
암환자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윤슬케어'의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작은 물결'이라는 뜻이다. 이 회사 정승훈 대표도 암경험자다./사진제공-=아미북스

정 대표가 2018년 만든 ‘윤슬케어’는 선배 암환자가 후배 암환자가 병원에 갈 때 함께 가주고, 경험을 나눠주는 ‘암환자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보건복지부와 서울시가 지정한 ‘예비 사회적 기업’이다.

정 대표는 회사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윤슬케어는 선배 환우의 멘토링을 통해서 암 환우의 지친 마음을 토닥여주고, 암 경험자의 연결을 통해 함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정 대표 자신이 암을 겪지 않았다면 만들 수 없었던 회사다. 어쩌면 2012년 3월 이전까지는 정 대표 본인도 이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꿈조차 꾼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암이 그를 지금의 모습으로 이끈 것이다.

윤슬케어 정승훈 대표는 백혈병의 일종인 버킷림프종 3기를 극복했다.
윤슬케어 정승훈 대표는 혈액암의 일종인 버킷림프종 3기를 극복했다.

2012년 2월 대학 졸업 직전. 몸상태가 안 좋아 찾은 동네 병원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3월 대학병원 조직 검사에서 복부, 목, 팔, 허벅지, 뼈에서 암세포가 발견됐다. 혈액암의 일종인 버킷림프종 3기. 백혈구 속 B림프구가 악성세포로 변한 것으로, 빠르게 증식하고 공격적인 특징을 가진 암이다. 정대표는 8개월에 걸쳐 6차례의 항암치료와 자가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다.

그는 죽음의 두려움을 빨리 내려 놓았다고 한다. “치료의 결과를, 살고 죽는 것을 내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치료의 시작”이라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치료 중 몸의 반응을 확인하고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기는 것에 집중했어요. 과학실험을 하듯이…”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신체적인 고통은 힘들었다. 항암치료로 인해 몸은 지치고 부작용이 자꾸 생겨나면서 마음도 같이 무너지곤 했다. 반복되는 치료에 ‘이렇게 힘들게 치료를 받으며 사는 게 맞나?’ 하고 무기력을 느낀 적도 여러 번이다.

자가조혈모세포이식 직후에는 물도 못 마실 정도로 힘든 적이 있었다. 의사 한 분이 병원 편의점에서 캔 음료를 종류별로 사와 한 개 씩 컵에 따라 주면서 마실 수 있는 음료를 함께 찾아줬다. 그 중에 딱 한 종류를 마실 수 있었는데, 그 때 마신 한 모금이 빠른 회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패혈증으로 1주일 정도 잠만 잤던 때도 있었는데, 잠에서 깨어나자 간호사 선생님들이 정말 다행이라고 기뻐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어요.”

 

혈액암협회에서 암환자 멘토링 하다 암환우 돕는 '윤슬케어' 창립

암을 겪고 나면 자신의 경험을 환우들에게 나눠주는 암 경험자들이 적지 않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정성을 쏟는다. 정승훈 대표도 그런 삶을 살고 있다. 치료 후 인터넷 환우 카페와 블로그 등을 통해 멘토링을 하던 정 대표는 한국혈액암협회 일을 시작했다. 개인적 차원에서 멘토링을 하기보다는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암환자 지원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암환자와 상담을 하면서 사회적 기업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암환우가 치료를 받는 동안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치료를 끝낸 뒤 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 대표는 자신의 생각을 삶 속에서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게 윤슬케어다. 꿈이 현실이 되고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수익 창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정 대표가 선정한 첫 사업 아이템은 ‘암환우 동행 서비스’였다. 암환자가 치료, 정기적인 검사 등을 하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할 때 보호자 대신 동행하는 서비스다. 혼자 투병 중인데, 도움이 필요한 환자도 서비스 대상이다.

정승훈 대표는 다른 암경험자들과 함께 '암밍아웃'이라는 책을 함께 펴냈고, 암환자의 사회복귀를 돕는 사회적협동조합 온랩의 이사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두번째가 정승훈 대표다./사진제공=아미북스
정승훈 대표는 다른 암경험자들과 함께 '암밍아웃'이라는 책을 함께 펴냈고, 암환자의 사회복귀를 돕는 사회적협동조합 온랩의 이사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두번째가 정승훈 대표다./사진제공=아미북스

"암환자 병원 동행ㆍ멘토링, 사회적 기업이 역할해야"

환자 집부터 병원까지, 그리고 진료·치료 후 병원에서 집까지 동행하는 게 기본적인 업무. 병원을 오가는 동안 환자 가족의 간병 부담을 나누는 것이다. 이동 중이나 병원 대기 중 상담 또는 멘토링도 함께 이뤄진다. 환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일, 주로 환우 카페나 블로그 같은 SNS를 통해 이뤄지는 투병 경험 나누기도 이 때 이뤄진다.

정 대표는 “치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는 암환우에게 ‘나도 암 경험자예요’라고 말하면 금방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을 터놓게 된다”며 “동행 멘토는 기본 교육을 받은 암경험자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홍보가 덜 된 데다 환우분들이 비용 부담을 느끼고 있어 아직 목표만큼의 동행 서비스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하지만 암환우와 보호자들에게 위로와 쉼의 시간을 드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동행 서비스 비용은 1회(4시간 기준) 당 7만원(교통비 별도)이며, 그 뒤 1시간 당 1만5000원이 추가된다.

동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암환자에게만 유익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정 대표는 “동행 멘토로 참여하는 암경험자에게는 자기 효능감을 높이고 사회 복귀의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바램이 있다면 동행 서비스 뿐 아니라 멘토링, 미술·운동·심리·영양 등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환우들이 부담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예산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슬케어는 암환자 병원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암환자들을 위한 '힐링 다이어리'를 제작한다. 정승훈 대표는 "암환우의 사회적 복귀를 지원하는 사회적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사진제공=아미북스
윤슬케어는 암환자 병원 동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암환자들을 위한 '힐링 다이어리'를 제작한다. 정승훈 대표는 "암환우의 사회적 복귀를 지원하는 사회적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사진제공=아미북스

윤슬케어는 암환자 힐링 다이어리도 제작했다. 정 대표는 “투병 수첩에 그치지 않고 암 환우들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고 현실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암보다 강한 당신>은 암으로 혼란스럽고 지쳐 있는 환자에게 위로를 전하고 투병의 의지를 북돋을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했다. 두번째로 제작된 <어느 날 암이 찾아왔습니다>는 투병 중인 환자의 가족과 지인들이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면서 환자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는 스토리로 구성했다고 한다.

 

암경험자의 사회복귀 돕는 협동조합 '온랩' 이사장 맡아

정 대표의 암환우 지원 활동은 다양하다. 지난해 조진희 아미북스 대표 등 암경험자 3명과 함께 <암밍아웃 Vol 1-제주도 편>을 펴냈다. 암밍아웃은 투병 체험기라기보다는 암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새로운 삶에 대한 통찰을 기록한 것으로, 지난 4월 ‘Vol.2 서울시장 편>이 나왔다.

정 대표는 사회적협동조합 ‘온랩’의 이사장도 맡고 있다. 암 경험자를 비롯해 심리상담사, 가수, 기업체 사회공헌 담당자 등 개인 13명과 법인 4곳이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온랩에 대해 정 대표는 “암경험자의 사회복귀를 돕는 통합 기획사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암 덕분에 행복하게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봉길 의사의 편지 글을 좋아한다고 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산다. 이상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자이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목적의 열매를 맺기를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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