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밍아웃 – 암이 탄생시킨 새로운 단어들 Vol.2’(아미북스 발행)은 암 경험자 네 명의 이야기다. 책 제목도 내용도 완전히 예상 밖이다. 흔히 예상하는 내용의 투병 에세이가 아니다. 저자들은 암으로 인해 새롭게 '탄생시킨' 단어로 각자의 일상과 생각을 담담하게 썼다. 서울의 시장과 주택가 골목과 삶의 현장이 무대다.
2011년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재발로 인해 수술을 세 번 받은 금정화 씨.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가는 ‘입원'이 금씨에게는 ‘다시 나에게로 가는 여행’이다.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정리한다.
참기름에 애호박을 볶고
호두를 넣어 멸치도 조리고
콩나물국과 된장국을 끓이고…
시간에 쫓기며 나갈 준비를 한다.
그렇게
여행을 간다.
아니, 병원을 간다.
여행 가방을 싸듯
필요한 짐을 꾸리고
호텔 체크인하듯
입원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여행을 온 듯
주부가 아닌,
다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딸이나 며느리로 살아가야 하는 게 숙명인 주부 암 환자의 투병과 일상을 이런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5년을 무사히 지낸 후 <일 년만 잘살아 보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겠다”는 그녀의 꿈이 꼭 이뤄지기를...
2017년 난소암 복강 내 전이로 3기 판정을 받고 직장을 1cm 남기고 절제한 유지현 씨. 수술과 방사선치료의 부작용으로 여전히 일상이 불편한 유씨에겐 ‘덤’이라는 단어가 시장에서 흥정 끝에 얻어내는 물건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다.
이 허약한 몸으로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남은 인생이 덤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목숨값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인심 좋게 더 얹어준 덤 말이다.
이제 난 내 목숨값을 주관하는 누군가에게 능글맞게 빌어본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내 인생의 시간을 더 달라고 말이다.
흥정은 안 통할 테니 인심 좋게 덤으로 더 얹어달라고 빌어 볼 참이다.
유씨는 덤으로 인생의 시간을 좀 더 받게 된다면 암 경험자와 가족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영국의 ‘매기센터’ 같은 공간을 한국에 만드는 것이 꿈이란다.
2018년 폐암2기A 진단과 함께 수술,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6개월 뒤 재발로 4기 진단을 받은 정수빈 씨. 그녀에게 암환자라는 단어는 ‘암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녀는 자신이 ‘행복한 암환자’라고 생각한다. 방파제라는 단어에서 ‘아픈 엄마 때문에 일찍 철이 든 아들’을 떠올리고, 녹즙에서 남편의 사랑을 느낀다.
표적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치유 중인 정씨는 본인의 경험을 유튜브와 책, 그리고 강의를 통해 많은 암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사는 게 목표다.
자궁내막암 수술을 받은 이정아 씨. 그녀에게 암이란 단어는 ‘새로운 나’다.
암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선 엄마를 데려갔고
20년 후엔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오빠를 데려갔다.
그리고 10년이 더 흐른 후엔 나를 찾아왔다.
열 살짜리 막내아들 옆에 두고
암을 진단받던 날,
주책없이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 옛날 병원에서 돌아오지 못한 엄마가 생각났고… 겁이 났다.
생각보다 순조로웠던 치료 후
지금의 나는 암을 만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
무력하게 엄마와 오빠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암이라는 이 녀석을 이겨보리라 마음먹으며
오늘도 암이랑 맞짱 뜨며 잘살고 있다.
친정 엄마, 오빠를 저 세상으로 데려간 암. 그래서 트라우마가 되었을 법 한데, 용감하게도 이 씨는 “암이랑 맞짱 뜨며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바람은 하나다. ‘행복해 지는 것’. 그래서 웃을 일이 많은, 웃음이 있는 곳에 꼭 함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암, 하면 떠오르는 암울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투병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서 환자 본인이든 주변 사람이든 꺼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 네 사람은 밝디 밝은 표정의 모습과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장과 주택가 골목길과 삶의 현장을 배경으로 털어 놓는다.
암경험자로 지난해 '암밍아웃 Vol 1, 제주도편'의 필자로 참여했던 아미북스 조진희 대표는 "암환우 스스로가 만든 편견에서 벗어나고 치료를 잘 끝내서 일상으로 복귀할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암환우 가족, 친구들도 이 책을 통해 암환우를 이해할수 있었음 좋겠다"고 말했다.
12여년 전 대장암 3기를 진단받고 저자들과 비슷한 암 경험자의 길을 걸었던 ‘암투병 동지’로 저자들의 삶을 응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