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그리고 러너'라는 묘비명을 남기고 싶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달리기 철학을 이야기한 인터뷰가 '러너스 월드' 2005년 10월 3일자에 실렸다./ Runner's World 캡처
'작가, 그리고 러너'라는 묘비명을 남기고 싶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의 달리기 철학을 이야기한 인터뷰가 '러너스 월드' 2005년 10월 3일자에 실렸다./ Runner's World 캡처

가장 인문학적인 마라토너는 누구일까?

가장 낭만적인 마라토너는 또 누구일까?

결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서슴지 않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꼽는다.

 

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이 세계적인 러너는 위와 같은 묘비명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일본소설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계인의 소설을 쓴 첫 일본인 작가라고 불린다.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소화한 소설들로 국내에서도 사랑을 받는 하루키는 문학적 문화적 소양이 대단해 재즈와 와인에 대해서도 놀라운 경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그가 달리기를 사랑하는 마스터스 마라토너라는 것. 그는 작가의 일과 마라톤을 비슷한 성격의 일로 보았고, 달리기를 함으로써 글쓰기의 영감을 얻고, 달리기를 했기에 오늘의 세계적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달리기 관련 서적의 고전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책은 소설가 하루키가 마라토너 하루키와 하나임을 천명하고, 그의 문학의 원천이 달리기임을 선언하고, 달리기의 의미를 가장 인문학적이고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매니페스토이다.

이 글의 인용문은 문학사상 간행, 임홍빈 번역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따왔다.
이 글의 인용문은 문학사상 간행, 임홍빈 번역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따왔다.

만약 내가 소설가가 되었을 때 작정하고 장거리를 달리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내가 쓰고 있는 작품은 전에 내가 쓴 작품과는 적지 않게 다른 작품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가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든다. 아무튼 여기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온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을 나 스스로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33세의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하루키는 그때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었다고도 고백한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떠난 나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락(凋落)은 그 나이 언저리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하나의 분기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그것은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운명 같은 것이다. 달리기를 시작한 것도,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러너가 되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누군가의 부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설가가 되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닌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달리고, 또 소설을 쓴다.

나는 올 겨울 세계의 어딘가에서 또 한 번 마라톤 풀코스 레이스를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또 어딘가에서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에 도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계절이 순환하고 해가 바뀌어간다. 나는 또 한 살을 먹고 아마도 또 하나의 소설을 써가게 될 것이다.”

 

흔히들 장거리 달리기 혹은 마라톤을 인생과 같다고 한다. 사실, 마라톤이 인생과 같다기보다는 인생의 훈련이요, 인생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하루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제의 자신이 지닌 약점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가는 것,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꼭 그와 같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같은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고 주변에 달리기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다니는 기자가 하루키와 100% 공감하는 대목이 있다.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가로서든 달리는 사람으로서든 하루키는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 없다. 매일 달리고 매일 쓴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라면 대형 트럭 가득히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그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일뿐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부지런히 빈틈없이 단련하는 것.”

 

부지런히 단련한다고 하니 무척 힘들고 의지와 인내만 필요한 일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달리는 것은 멋진 일이다. 마라톤은 숨가쁘게 벅찬 감동이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고통의 축제일지언정, 진정 축제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이렇게 고백한다. 달리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는 내밀한 기쁨, 당신들은 경험해 보지 못한 달콤한 사랑이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 하루키는 정말 사랑스러운 인간이다.

아, 달리기는 정말 아름다운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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