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냈던 암요양병원, 절망 속에서 삶을 다시 배우게 해준 학교였다
■ 스토리텔러 에세이_나의 암요양병원 생활
암 요양병원은 항암치료의 부작용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암환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부작용이 심하거나, 수술 후 회복이 더딘 환자들이 찾아온다. 나 역시 선행 항암치료 때부터 부작용이 너무 심해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항암부작용으로 복부팽만, 오심과 구토가 이어져 식사를 거의 할 수 없었다. 고령의 아버님이 함께 사셔서 주부인 나는 집에서 요양하기 힘들었다. 결국 암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수액에 의존하며 매주 연속되는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내게는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지냈던 강북구의 P암요양병원에서는 신기하게도, 암을 잠시 잊을 만큼 따뜻한 풍경도 있었다. 입원 첫날,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저는 유방암인데, 어떤 암이세요?”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암보험은 들었어요?”, “실비보험은요?”
치료비 걱정부터 가발 이야기까지, 실질적인 조언이 오간다. “머리카락은 항암 후 2~3주 지나면 매생이처럼 뭉텅뭉텅 빠지니까, 그때 미용실 가면 돼요.” “가발은 저렴한 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해요. 오히려 답답해서 잘 안 써요.”
그렇게 환자들은 서로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낯선 고통을 함께 견뎌 나간다. 가장 많은 환자는 유방암 환자들이었다. 처음엔 다들 조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친구가 된다.
젊은 환자일수록 처음엔 커튼을 치고 혼자 울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럴 땐 누구도 무리하게 다가가지 않는다. 서로의 슬픔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조심스레 기다려준다. 그러다 어느 날, 누군가가 삶은 고구마 하나를 건네며 말한다. “이거, 조금 드셔보실래요?” 그 작은 나눔에서 마음이 열린다.
나 역시 부작용이 심할 때는 거의 잠만 자며 버텼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1인실로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가족의 면회도, 전화도 거절한 채 치료에만 전념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무너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요한 고통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치유의 시간이 되었다.
병동의 이웃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견디고 있었다. 처음 항암을 시작하며 부작용 이야기를 듣고 겁에 질려 울던 분에게, 암 선배가 다정하게 말했다. “항암 부작용은 사람마다 달라요. 암은 깜깜한 암(暗)이에요. 누구도 어떻게 진행될지 몰라요. 그러니 미리 겁먹지 말아요.” 그 단호한 위로는 어떤 약보다 강했다.
연세가 있는 분들은 의외로 담담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즐겁게 살아야지요.” 그분들의 웃음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한 유방암 환자는 수술 전 성형외과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쁜 친구가 날 찾아왔으니 잘 좀 해주세요.” 수술대에 누워서도 “내 평수가 커서 침대가 좁네요”라며 웃음을 잃지 않았다. 수술실에서는 트로트 음악을 틀어달라 요청했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모두가 웃었다. 그분의 긍정적인 태도는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암을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선물로 느끼게 되었다. 고통은 내게 현재를 살게 했고,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암은 나에게 축복이었어.” 그 말이 처음엔 믿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 진심이 되었다.
암요양병원에서의 하루는 소소하지만 따뜻하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식사를 못하는 환자가 있으면 누군가 고구마나 감자를 한솥 쪄 온다. 휴게실에 모여 암의 종류, 치료 경험, 보험 이야기, 가족의 고마움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순간만큼은 암의 고통이 잠시 내려진다.
오랜 투병을 이어온 환자들은 초발 환자들에게 말한다. “관리를 잘해도 재발은 막기 어려울 때도 있어요. 그래도 또 치료하고, 견디면서 살아가요.” 그 말에는 두려움보다 ‘살아 있음’에 대한 감사와 단단한 의지가 묻어 있었다.
내가 지냈던 요양병원에서는 싱잉볼 명상, 명화 그리기, 손뜨개, 요가, 원예치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그 시간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위안을 얻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끔 말기 환자를 마주할 때면 병동 전체가 조용해진다. 연민과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삶을 묵상하며 많은 환자들이 말한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늘 바쁘게, 정신없이 살았을 거예요.”
암은 우리 인생의 문장 속에 찍힌 쉼표였다. 멈춤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삶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삼중음성유방암으로 선행 항암과 후행 항암을 합해 16회를 마치고 방사선치료까지 받았다. 부작용은 유독 심했지만, 그 시간을 감사하게 여긴다. 그곳에서 나는 고통을 통해 사랑을 배웠고, 아픔 속에서도 굳건하게 견디어내는 인내를 배웠다.
특히 여성 환자들에게 요양병원 입원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집을 떠나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며 치료받는 시간, 그것이야말로 회복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암 요양병원은 내게 단순한 치료를 위한 보호와 격리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절망 속에서 삶을 다시 배우게 한 학교였다. 암은 나의 인생에 쉼표를 찍어준 고마운 친구였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을 진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예민한 암환자들에게 보여주신 모든 직원들의 친절과 사랑, 고요한 명상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신 사랑 넘치는 싱잉볼 강사님을 초대해주신 원장님의 포근한 맘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덕분에 치유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