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석상의 이스터섬 '라파누이', 그곳에 불로초가 있다?
화제의 책 '노화의 종말'에 소개된 '장수약' 라파마이신
투박한 모습의 큰 머리를 가진 거대석상들이 바다를 향해 늘어서 있는 곳, 이스터섬. 칠레에서 서쪽으로 3700km 떨어진 외딴 화산섬이다. 그곳 원주민들 언어로 넓은 땅이라는 뜻의 '라파누이'가 이스터섬의 원래 이름이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늘어서 있는 모아이 석상은 무려 900개에 달한다. 영화 <라파누이>를 통해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곳에는 '장수약'이 나온다.
불로초를 찾아 세상을 떠돈 중국의 고대설화 비슷하게, 1960년대 일군의 과학자들이 라파누이 섬으로 갔다. 토착 미생물을 찾으려는 생물학자들이다. 모아이 석상 하나가 박혀있는 흙에서 그들은 새로운 방선균을 발견했다. '스트렙토미세스 히그로스코피쿠스'라는 이름의 방선균. 제약학자인 수렌 세갤은 이 방선균이 항균 화합물을 분비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 화합물에 '라파마이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파누이 섬을 기념하는 이름이다.
면역억제제 라파마이신의 수명연장 효과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대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에는 라파마이신의 발견 과정과 효능에 대한 시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처음엔 이 화합물이 무좀균 같은 곰팡이 질환에 유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연구를 시작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면역계에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장기이식이 실패하는 이유는 환자의 몸이 장기를 거부하기 때문인데, 라파마이신이 장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면역반응을 억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연구가 진행됐다.
진짜로 그랬다. 라파마이신은 면역억제제임이 밝혀졌고, 이에 멈추지 않고 수명 연장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 세계 다양한 연구에서 일관되게 나온 결론이었다.
싱클레어 교수의 하버드대 연구팀은 직접 라파마이신의 생명연장 효과 연구를 진행했다. 효모를 대상으로 했는데, 정상 효모 세포 2000마리를 배양하면 6주 뒤 불과 몇 마리만 살아 남게 되는데, 효모들에게 라파마이신을 먹였을 때 6주 뒤 약 절반이 건강하게 활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초파리ㆍ생쥐 수명 연장, 인간으로 치면 10년
초파리에게 라파마이신을 먹이면 수명이 약 5% 늘어나고, 수명이 몇달밖에 남지않은 생쥐에게 소량의 라파마이신을 투여하자 수명이 9~14% 늘었다. 사람으로 치면 건강하게 10년 정도를 더 사는 셈이라는 게 싱클레어 교수의 설명이다.
라파마이신이 만능 통치약은 아니다. 생명이 짧은 동물에게는 좋은 영향을 잘 미치지만 오래 사는 동물에게도 그같은 효과를 낸다고 볼 수는 없다. 또 고용량으로 장기 복용하면 콩팥에 독성을 일으킨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소량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복용하면 안전하다. 생쥐의 수명을 늘렸으며 사람에게는 독감 백신 접종을 한 노인들의 면역반응을 대폭 향상시켰다.
<노화의 종말>은 아직은 라파마이신이 '불로초' 급의 장수약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라파마이신 유사 물질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이와 비슷한 또다른 약학적 경로들도 존재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뇌ㆍ피부 노화 억제, 수명연장 메커니즘 밝혀져
한편, 라파마이신의 수명연장 효과에 대한 연구는 곳곳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다.
미국 드렉셀대학 의대 크리스천 셀 분자생물학 교수 연구팀은 라파마이신이 피부 노화의 핵심 표지인 단백질을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지난해말 발표했다. 피부노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다. 지속적으로 손에 바르면 손 피부에 콜라겐이 증가하고 노화표지 단백질은 줄어든다는 것.
미국 텍사스대학 보건과학센터의 베로니카 갤번 세포생리학 교수 연구팀은 뇌혈관의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를 규명했다. 연구팀은 쥐(rat)의 '중년'에 해당하는 생후 19개월 된 쥐들에 아주 적은 용량의 라파마이신을 매일 투여하기 시작해 '노년'에 해당하는 생후 34개월이 되기까지 계속했다. 그 결과 이 쥐들은 '노년'이 되었는데도 '중년'처럼 보였으며 뇌의 혈류 상태는 라파마이신 투여가 시작된 '중년' 때와 똑같았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라파마이신이 투여되지 않은 다른 쥐들은 '노년'이 되면서 뇌 혈류가 감소했다.
또한 라파마이신은 동물실험에서 수명이 늘어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 오레곤 주립대의 연구에 따르면, 보통 세포가 50회 정도 분열하고 나면 염색체 말단의 텔로미어가 짧아져 세포분열이 중단되면서 노화와 염증이 발생하는데, 라파마이신이 그런 과정을 중단시키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쥐 실험에서 라파마이신을 투여하면 신체 단련도가 향상되고 노화에 따른 신체활동량의 감소폭이 줄고 인지기능과 심혈관 건강이 개선됐으며 암 위험이 줄고 수명이 길어졌다.
라파마이신의 안티에이징 효과가 좀더 규명되고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면, '노화의 종말'도, 수명연장의 꿈도 현실이 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