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인문학 9] 이봉주, 끈질긴 생명력으로 영웅이 되다
'면역력 해결사' 달리기(34) 현대 한국마라톤의 영웅 4명
손기정이라는 걸출한 이름으로 시작되는 한국 마라톤의 역사. 힘든 시절을 버티어온 역사만큼이나 상징성 있는 운동으로 마라톤이 자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아주 힘들게, 온몸과 마음을 다해 마라톤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 현대마라톤으로 넘어오면, 다른 이름들이 등장한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마라톤 한국을 이끌어온 4명이 있다. 감독 정봉수, 감독 오인환, 선수 황영조, 선수 이봉주. 4명의 이름은 한국 마라톤을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현대 한국마라톤을 이끈 4명의 영웅들
정봉수= 한국마라톤의 산증인이자 오기와 집념을 지닌 `고독한 승부사' 정봉수 감독. 그는 1990년대에 독한 조련술로 황영조, 이봉주, 권은주 등을 훈련시켜 한국마라톤이 40년간의 암흑기에서 벗어나 세계 정상으로 재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정감독은 김천 시온고등학교를 거쳐 육군에 투신, 20여년 동안 육군팀 육상코치를 지내다 상사로 전역하며 1987년 코오롱마라톤팀을 이끌었다. 그의 손에서 길러진 선수들이 1996년 은퇴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국민마라토너' 이봉주(삼성전자), `기록제조기' 김완기 등이다.(2001년 정봉수 감독 부고기사 연합뉴스)
오인환= 이봉주가 발군의 성적을 내면, 그 뒤엔 항상 삼성전자 오인환(49) 감독이 있었다. 오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적인 마라톤 지도자. 1990년대 마라톤 명문팀 코오롱에서 코치로 활동하며 고(故) 정봉수 감독과 함께 이봉주, 김이용 등을 키워냈다. 국내에서 2시간7분대 기록은 두 선수만 갖고 있다. 이봉주의 2001 보스턴마라톤 우승과 아시아경기 2연패의 영광 뒤에도 오 감독이 있었다. 남자 마라톤뿐만이 아니다. 그는 여자육상 장거리의 간판 이은정이 2004년 삼성전자 유니폼을 입은 뒤 1년 만에 마라톤을 제외한 5개의 한국 신기록을 쏟아내게 만들어 육상계 '미다스의 손'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한국 마라톤 과학화를 위해 누구보다 노력해 온 오 감독은 2005년 동국대 체육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지 16년 만에 '고지훈련'을 주제로 박사 과정에 합격해 '과학적 훈련'에 대한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2007년 이봉주 동아마라톤 우승 직후 동아일보 기사)
황영조= 황영조는 상금이 없는 주요 국제 대회에서 세 차례 우승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숙적 일본의 모리시타 선수를 몬주익 언덕에서 뿌리치고 2시간13분23초로 금메달을 따냈다. 황영조가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것은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올림픽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처음이다. 황영조는 1991년 영국의 셰필드에서 벌어진 여름 유니버시아드대회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코오롱 소속이던 황영조는 코오롱의 정봉수 코치가 국가대표 코치에서 탈락하자 코치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혼자 해냈다. 하지만 황영조는 보란 듯이 우승했다. 2시간12분40초.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의 하야타 선수를 제치고 2시간11분13초로 금메달을 따냈다. 이로써 황영조는 세계 마라톤 역사상 올림픽·유니버시아드·아시안게임 등 3대 종합 제전에서 모두 금메달을 거머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2001년 시사저널, 한국최고 스포츠영웅, 황영조냐 이봉주냐)
이봉주= 1970년 충남 천안 출생. 168㎝에 선수시절 57㎏. 천안농고 1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육상을 시작, 고교 졸업 때까지 중장거리 선수로 뛰었다. 우여곡절 끝에 삽교고, 광천고 등 세 군데 고등학교를 다닌 뒤 서울시청팀에 입단하면서 마라톤을 본격 시작했다. 서울시립대 졸업. 하프마라톤 한국 최고기록(1시간1분4초, 1992년 도쿄하프마라톤대회)과 마라톤 풀코스 한국 최고기록(2시간7분20초, 2000년 도쿄국제마라톤대회) 보유. 2009년 서른아홉 살에 은퇴할 때까지 20만㎞(지구 네 바퀴)를 훈련해 풀코스 41번 완주, 국내외 대회에서 열 차례 우승하고 여섯 번 준우승했다.(2014년 한국경제, 이봉주 인터뷰 중 약력부분)
끈기와 겸손, 마라토너 이봉주
보통 마라톤 선수들은 한창 때 1년에 한두번 풀코스 대회를 뛴다. 그리고 4, 5년쯤 전성기 선수생활을 한다. 길어봐야 올림픽엔 2회 정도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이봉주 선수는 2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41차례 풀코스 대회를 뛰었다. 그리고 수많은 기록들을 만들어냈다.
이봉주. 요즘 TV 예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의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안다. 그의 몸매도 예전과 비슷하다. 세계 최상급의 선수였으며, 국가적 스포츠영웅으로 불리는 그가 짓는 묘한 표정은 어딘가 어색하고 낯설다. 그러나 기분 나쁘지 않은 어색함이다. 겸손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어딘가 약한 구석이 많은 듯한 표정이다. 그런 그가 마라토너다. 그것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투혼으로 똘똘 뭉친 마라토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체코의 마라톤 영웅 에밀 자토펙이 생각난다. 그래서 그를 묘사하는 기사에 툭하면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고 하는 자토펙의 명언이 자주 등장하는지 모르겠다. 자토펙은 마구잡이 폼으로 쓰러질 듯 달리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골인한다. 남들보다 한참 앞서서. 너무 쉽게 달린 마라톤 대회에서는 골인 직전, 남들이 못알아 볼까봐 고통에 찌든 얼굴표정을 애써 지으며 스타디움에 들어선 적도 있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런 불멸의 마라토너 자토펙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다. 공산 체코의 이상한 통치 때문에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면서도 그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열심히 달렸다. 그의 인생이 마라톤이었다.
이봉주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끈기와 겸손의 마라톤이라는 점에서, 그는 세계 최고다.
오인환이 말하는 마라토너 이봉주
2003년 9월 2일 그리스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 그리스 신화가 살아 숨쉬는 듯한 특유의 길쭉한 타원형 트랙을 바라보며 이봉주는 말이 없었다. 막 숙소로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이봉주가 혼잣말을 했다. "여기서 우승해야 진짜 우승인데...." 이봉주 특유의 잦아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해질녘 조요하기만 한 아테네 시내의 한적함을 배경으로 우리 일행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녀석, 겉은 순박하기만 한데 역시 승부사군. 영화대사 같은 말도 할 줄 아네.'
이봉주는 늘 황영조와 비교되곤 한다. 그와 동갑이고, 황영조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인생의 맛을 알게된 절친이다. 그 둘은 너무나 달랐다. 타고난 조건으로 영웅적인 올림픽 금메달을 남기고는 홀연히 떠나버린 카우보이 같은 사나이가 황영조라면, 조용히 끊임없이 노력하고 차분하게 이뤄가는 마라톤 같은 사내가 이봉주다.
그런 그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바로 올림픽 금메달. 세계적인 대회에서 수많은 좋은 기록을 만들었고, 상금도 많이 받았지만, 올림픽 금메달이 없다. 마라톤이지 않은가. 고대 그리스의 정신이 살아있는 마라톤 대회, 올림픽 경기. 그러니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착하고 순하고 한결같고 끈기있고 겸손한 이봉주도 올림픽 금메달만은 꼭 가져보고 싶었을 터이다.
그래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2003년 현지 답사를 간 오인환 감독 일행은 이봉주의 이런 넋두리를 듣고, 그의 욕망 한자락을 알게 되었다.
(로테르담) 현지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부터 체내 탄수화물을 고갈시키는 강훈련에 돌입했다.… 10,000m 지속주를 하는데 끊임없이 비가 왔다. 로테르담에 도착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봉주는 싫은 표정 한번 없이 비바람을 맞으며 혼자 운동장을 돌았다. 운동장 옆에 큰 공원이 있었는데 거기에 아주 큰 식당이 있었다. 식당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과 훈련을 하러 왔다가 비 때문에 쉬고 있는 선수 및 관계자들이 모두들 신기하다는 듯 이봉주의 비바람 속 질주를 구경했다.
길고긴 마라톤 인생에서 이봉주도 슬럼프가 있었다. 후배 김이용에게도 밀리는 신세가 되자 그는 은퇴를 고려했다. 그러나 오뚝이 같은 이봉주는 다시 일어서기로 하고, 남들이 말리는데도 힘든 코스로 유명한 로테르담 마라톤에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며 초인적인 의지로 훈련을 소화해낸다. 다들 불가능할 거라는 몸상태로, 다들 쉬고 있는 유럽의 궂은 날씨를 뚫고 이봉주는 훈련을 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로테르담 대회에 선다. 지긋지긋하던 비가 그친 날, 이봉주는 힘차게 출발했다. 20km까지는 2시간 7분대 속도. TV 속 이봉주는 여유로웠다.
무명의 스페인 선수 론체로에게 17초 뒤지기는 했으나, 2시간7분27초의 호기록으로 2위를 했다. 한국선수 최초의 2시간 7분대다. 8분의 벽을 깼다. 그리고 이봉주의 두터운 슬럼프의 벽도 깼다.
이봉주도, 오인환도, 김포공항의 국민들도 난리가 났다. 모두가 좋아하는 마라토너 이봉주가 해냈다.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것이 이봉주의 힘이다.
좋은 사람 이봉주, 에피소드들
#1 1000만원
한국 마라톤의 산실은 누가 뭐래도 오랫동안 코오롱이었다. 코오롱마라톤팀은 정봉수 감독과 황영조 선수로 대표된다. 오인환도 코치로 있었고, 이봉주도 한때 한솥밥을 먹었다. 그러다 우여곡절 끝에 오인환이 쫓겨난다. 이봉주와 그를 좋아하는 선수들도 나왔다.
한 동안 선수들이 스폰서 없이 십시일반으로 먹고살면서 훈련을 했다. 한동안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취재온 기자가 금일봉을 놓고 가기도 했단다. 어느날 선수 이봉주가 오 감독을 찾아와 불쑥 돈을 내밀었다. 1000만원이었다. 선수 중 형편이 나은 이봉주가 선수 훈련비를 내놓은 것. "코치님, 새로 팀이 구해지기 전까지 일단 이 돈이라도 쓰시죠."
오 감독은 눈물이 날 듯했다. "차마 선수의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봉주는 강하게 버텼다..... 하는 수 없이 이 돈을 훈련비에 포함시켰다. 선수가 자기 돈을 투자하며 훈련한 것도 아마 한국 육상사에 있어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그해 겨울은 아직도 나에겐 몹시도 추운 겨울로 기억된다." 오 감독은 이렇게 회고했다.
#2 부산아시안게임 태극기
2002년은 한국 스포츠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한일월드컵 4강의 신화가 씌어진 때다. 온국민이 환호하고 작약하던 그 해, 10월엔 이봉주의 아시안게임 2연패라는 위업이 있었다. 4월에 결혼한 이봉주는 한국땅에서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10월 13일 폐회 하루 전날엔 북한의 함봉실이 여자 마라톤 금메달을 따냈다. 그래서 남북 봉봉자매의 금메달에 대한 희망도 컸다. 그래서 거리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머리에 태극기 띠를 매고 언제나처럼 열심히 달리는 이봉주가 20km 지점부터 일찌감치 선두로 치고 나왔다. 거리에 나온 군중들은 기뻐 환호했다. 이봉주 일생 이렇게 많은 관중과 함께 뛴 것은 처음이란다. 선두에서 거의 홀로 뛰다시피한 이봉주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속에서 뛰기는 처음이에요. 절반 이상을 혼자 뛰었는데 전혀 외롭지 않았어요."
감격의 우승. 트랙을 돌 때 오인환 감독이 트랙으로 들어가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돌아서 나오려는 오 감독의 손을 이봉주가 잡았다. 그의 한 손엔 대형 태극기가 들려있었다. "감독님, 저랑 같이 돌아요."
오 감독은 이렇게 회고했다. "얼떨결에 이봉주의 손에 잡혀 다시 트랙으로 들어섰고, 둘이 태극기 하나를 함께 쥔 채 트랙을 도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이봉주와 많은 대회를 다녔고, 또 좋은 성적도 많이 냈지만 이렇게 기쁨을 함께 누리기는 처음이었다."
#3 기자의 첫 동아마라톤, 이봉주의 우승
이봉주 선수는 보스턴 마라톤을 우승한 선수다. 세계 최고(最古)의 메이저 마라톤 대회다. '하트브레이크 힐' 상심의 언덕을 달리는 그 대회를 우승하면서 그는 세계 최정상급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리고도 그는 끊임없이 국내외 대회에 참가했다. 특히 올림픽을 앞둔 시점에는 올림픽 출전자격을 얻기 위해 대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아마라톤이 자주 등장한다.
2007년. 기자는 그 전해 가을에 처음으로 마라톤에 입문했고, 2007년 첫 동아마라톤에 나섰다. 광화문에서 출발해 잠실 올림픽 경기장으로 골인하는 42.195km의 코스. 2시간 좀 넘게 달려 세종대학교~ 건국대학교 언저리를 지날 때, 갑자기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봉주가 우승했대" "봉달이가 우승했대" 거리의 응원단이 태극기를 휘두르고, 꽹과리를 울려댔다. 마치 자신의 행복인 것처럼들 좋아했다. 2시간 8분 04초. 상당히 좋은 기록이었다.
기자도 갑자기 힘을 냈다. 마치 내가 우승한 것처럼 기뻤다.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뛰고 있는 기자의 동아마라톤 첫 대회가 신나게 끝이 났다. 그리고 평생 써먹고 다닌다. "나, 이봉주 선수랑 같은 대회에서 뛴 사람이야. 손흥민이랑 공 찬 거나 마찬가지야. 김연아랑 스케이트 탄 거나 마찬가지야."
이봉주는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그런 좋은 러너다.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이 기사의 메인 텍스트는 오인환 감독이 2004년에 쓴 책 <오인환이 말하는 마라토너 이봉주>다. 은행나무 발행.